■ 글을 쓰는 이유
나는 원래 독서를 하면 99.9%는 소설이고, 또 그 소설의 독후감은 직접 노트에 쓰지만
이건 요즘 개발을 하면서 input -> output 으로 생각이 굳어져가고 있는 나를 위해
일부러 검색까지 해서 선택한 "철학"적 사고를 위한 책이기 때문에
특별히 좀 더 신경써서 정리해보려고 글을 쓰게 되었다.
일단 맨 앞의 두어장만 읽어도 내용이 어렵다. 가볍게 술술 읽히는 소설과는 다르다.
프랑스 철학자 구스타프 티본이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 사후에, 그가 적어둔 노트의 내용에 각각 제목을 달아서 출간한 것이라고 한다.
와 검색하다 알게 된 나의 놀라운 편견.
시몬 베유가 당연히 남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여자였다.
어쨌든. 기록을 시작해보겠다.
총 서른 아홉 개의 챕터가 있다.
1. 중력과 은총
20260310
- 영혼의 움직임은 중력 법칙과 유사한 법칙들에 의해 지배되며 은총만이 예외이다.
- 우리가 남에게 받기를 기대하는 것은 우리 안의 중력으로 결정된다. 우리가 남들에게서 받는 것은 그들 안의 중력으로 결정된다.
이 둘이 일치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일치하지 않는다.
시몬 베유가 말한 중력은 물리학 법칙에서의 중력이라기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말한다고 한다.
중력은 끌어당기는 힘을 말하는데 인간의 본성 중에 끌어당기는 게 뭐가 있을까?
남보다 나 자신을 먼저 생각하게 하는 힘을 말하는 것 같다.
자기중심적인 사고. 욕망. 인정받고 싶은 마음. 보상받고 싶은 마음.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런 마음들이 존재하고, 생기는 것.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 서로 서운함이 생기고, 오해가 생기고.
나아가 은총은 그 모든 본능을 초월한 것. 은총의 사전적 의미는 하나님(신)께 받는 사랑. 그런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인간의 본능을 뛰어넘을 수 있다.
- 아무리 훌륭한 행동이라도 그것과 같은 수위에서 사용 가능한 에너지가 없으면 인간을 저급하게 만들 수 있다.
- 저급한 것과 피상적인 것은 같은 수위에 있다. "그는 열렬히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가능하다. "그는 깊이 그러나 저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은 불가능하다.
'같은 수위의 에너지'란 무얼 말하는 걸까.
왜 '열렬히'는 저급함과 어울리는 걸까?
아무리 좋은 행동이라고 해도 '동기'가 선하지 않으면 인간은 저급해진다.보상을 바라고 건네는 선물, 칭찬.집착을 동반한 돌봄.
'열렬히'의 사전적 의미는 ' 어떤 것에 대한 애정이나 태도가 매우 맹렬하다' 이다.매우 맹렬하다는 것은 '은총'과는 거리가 멀어보이고, 중력이 강해보인다. 그래서 저급함과 어울리는 걸까?
만약 선의의 거짓말처럼 높은 에너지로 좋지 않은 행동을 하는 건 어떨까. 그건 고귀한 걸까? 적어도 저급하진 않게 느껴진다.그렇다면 결과보다 의도가 더 중요한 걸까.
본능에 충실한 '저급'한 것이 무조건 좋지 않은 걸까.
- 애원하는 자세. 반드시 나 자신 아닌 다른 것을 향해 돌아서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애원'의 사전적 의미는 '애처롭게 사정하여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내 자신에게 애처롭게 바라는 것은 나르시스트적인 사고를 말하는 것일까
강한 중력. 강한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시선이 외부로 향해야 한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것을 향해 돌아서서, 다른 것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타인을 살피고 겸손해져야 한다.
- 중력이 개입하지 않는 움직임으로 하강하기. 중력은 하강하게 하고, 날개는 상승하게 한다. 제곱의 힘을 가진 다른 날개가 중력 없이 하강하게 할 수 있을까?
- 창조는 중력의 하강 운동, 은총의 상승 운동, 그리고 은총의 제곱의 힘이 행하는 하강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 낮아지기, 정신적 중력에서 그것은 올라가기이다. 정신적 중력은 우리를 높은 쪽으로 떨어뜨린다.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잘 와닿지 않던 구절이다. 의미에 대해 GPT한테 물어보고 다시 읽으니 이제 조금 이해가 되는 것 같다.
'중력'이란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본능. 욕구.
'중력이 개입하지 않는 움직임으로 하강하기 '는 이기적인 마음 없이 겸손해지는 것.
중력이 개입된 하강은 인간의 타락에 가까워진다.
날개는 천사가 가지고 있는 것, 즉 하나님(신)의 은총. 그것만이 우리를 상승하게 하며
은총의 제곱의 힘이 행하는 하강운동, 즉 우리를 겸손해지게 하는 은총. 자기 비움.
'낮아지기. 정신적 중력에서 그것은 올라가기'
의식적 낮아짐은 정신적으로 올라가는 것.
'정신적 중력은 우리를 높은 쪽으로 떨어뜨린다'
권력을 추구하고 인정 받고자 하는 마음이 강해지는 것은 우리를 높은 쪽으로 향하게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 떨어지는 것. 중력에 의해 끌려가는 하강.
2. 빈자리와 보상
20260311
- 인간 역학. 고통을 겪는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동정심을 유발하는 식으로) 자신의 고통을 알리려고 애쓴다. 고통을 줄이기 위한 일이고, 그렇게 하면 정말로 고통이 줄어든다.
역학의 사전적 의미는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물체의 운동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
인간 역학. 인간에게 작용하는 힘과 인간의 행동과의 관계를 말하는 걸까.
고통을 겪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고통을 알리려고 애쓴다. 사람들은 나의 슬픔과 힘든 사정을 누군가에게 쏟아내며 마음의 무게를 가볍게 한다.
고통을 밖으로 알리려는 힘. 전달되면 심리적으로 약해지는 고통. 인간 역학.
- 악惡을 자기 밖으로 퍼뜨리려는 성향. 나도 여전히 가지고 있다!
- 내가 온전히 진흙으로 변한다해 해도 아무것도 더럽히지 않기를. 생각으로라도 아무것도 더럽히지 않기를. 나는 최악의 순간이 와도 그리스의 조각상 하나, 조토의 프레스코 벽화 하나 파괴하지 않으리라.
고통을 알리듯 인간의 스스로의 악함도 밖으로 퍼뜨리려는 성향.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남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
내 처지가 정말 최악이 되어도 그 누군가에게도 피해주지 않기를.
- 고통을 자기 밖으로 퍼뜨리려는 성향. 너무 약해서 타인의 동점심을 불러일으키지도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도 못할 때, 인간은 자기 안의 우주의 표상에 해를 끼친다. 그럴 때는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이 모욕이 된다.
누구에게도 나의 고통을 털어놓지 못하는 성향은 결국 스스로 해를 끼치게 되는 걸까.
자기 안의 우주의 표상.
스스로 내부를 파괴할 때 나타나는 것들. 냉소주의. 허무주의. 조롱.
그렇게 스스로 변질된 사람은 아름다운 것이든 선한 것이든 모두 왜곡하게 된다.
비포선라이즈가 떠오른다. 사랑이 충만할 땐 아름다워 보이던 것들이 사랑이 끝나면 단점으로 느낀다.
- 정념들을 끌어내려 한 점에 모아야 한다. 그런 뒤에 더는 관심 갖지 말 것. 무엇보다 모든 고통을 그렇게 다루어야 한다. 고통이 사물들에 다가가지 못하게 할 것.
정념의 사전적 의미는 강하게 집착하는 사랑과 미움의 감정.
그런 감정들을 하나로 모으고 모든 고통도 하나로 모아둔 뒤 관심을 주지 말 것. 그렇게 내 주위 사물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도록 내 일상이 고통에서부터 멀어질 수 있도록. 자기 절제.
- 보상은 어떤 형태로 주어지든 에너지의 손실이다.
- 선을 행한 한 후에(혹은 예술작품을 만든 후에) 느껴지는 자기 만족은 상위 에너지의 손실이다.
작가가 말하는 높은 에너지는 고귀한 것. 보상은 중력이 작용한 결과. 인정 받을 것이라는 기대.
선한 행동이더라도 그 뒤에 따라오는 자기만족은 자기 보상. 곧 저급한 행동. 상위 에너지의 손실.
- 실제로 주어진 보상이 넘치거나 모자랄 수밖에 없는 것과 달리, 상상의 보상은 자신이 쓴 에너지와 똑같은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상상의 이득만이 무한한 노력을 위한 에너지를 제공한다.
- 종교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다. 루이 14세의 미소를 얻지 못하는 우리는 우리에게 미소 지어줄 신을 만들어낸다. 혹은 우리 자신을 찬양한다. 우리가 쓴 에너지와 등가의 보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력과 마찬가지로 피할 수 없다.
나와 타인의 중력은 같기 어렵다보니 실제로 주어지는 보상은 늘 예상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상상의 보상만은 내가 쓴 에너지와 같다. 과함도 부족함도 없이 내가 쓴 에너지 그대로 다시 채우며 갈 수 있다.
실존 인물 루이14세에게 원하는 만큼의 보상을 얻기 어려우므로 인간은 결국 상상 속의 보상을 만들어낸다. 찬양할 신. 또는 찬양할 자기 자신.
- 사람들이 우리에게 빚진 것은 바로 그들이 우리에게 줄 거라고 우리가 상상한 것이다. 그 빚을 탕감해줄 것.
- 나 역시 나 스스로 상상하는 것과 다르다. 그 사실을 아는 것이 바로 용서다.
다른 사람에게 받길 원한 보상은 나의 상상일 뿐. 그것은 곧 내 마음의 빚. 기대가 사라지면 원망도 사라진다.
나의 중력 역시도 내가 상상하는 것과 다를 수 있다. 내 자신을 아는 것이 타인을 용서하는 출발점.
3. 빈자리를 받아들이기
20260312
- "어떤 존재든 언제나 자연의 필요에 따라 자신의 힘을 모두 사용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신들에 관련해서는 전승으로 믿고, 인간들에 관련해서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영혼은 기체가 그렇듯이 자기에게 주어진 공간을 전부 차지하려 한다. 수축해서 빈자리를 남기는 기체는 엔트로피 법칙에 어긋난다.
>> 엔탈피 (Enthalpy, H) : 일정한 압력에서 계가 가진 총 에너지
>> 엔트로피 (Entropy, S) : 계의 무질서한 정도
인간은 본래 자기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한다. 나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한다. 본능적으로 비어있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 내게 주어진 모든 공간을 차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권력을 행사하고. 내가 가진 것을 과시한다.
즉, 비어있는 상태는 자연적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 가진 힘을 모두 사용하지 않기, 그것은 빈자리를 견디기이다. 모든 자연법칙에 어긋난다. 오직 은총만이 할 수 있다.
- 은총은 채운다. 하지만 은총은 받아들이기 위한 빈자리가 있는 곳에만 들어온다. 그 빈자리도 은총이 만든다.
인간의 본능은 가지고 있는 힘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지만, 모두 사용하지 않는다면. 공간을 전부 차지하지 않는다면. 그만큼 빈자리가 생긴다.
자연법칙에 어긋나지만 그것을 견딜 수 있는 방법은 은총으로 채우는 것이다. 오직 은총만이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
하지만 먼저 빈자리가 있어야 은총이 들어온다.
본능을 거스르고 '나'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억누르고 빈자리를 만들 때 은총이 들어오고 그 빈자리를 채운다.
겸손. 자기비움을 통해 은총으로 채울 수 있다.
- 칭송과 동정(특히 이 두 가지가 섞인 것)은 실제의 에너지를 가져다준다. 하지만 그것들을 피해야 한다.
- 자연적이든 초자연적이든 보상이 없는 시간이 필요하다.
칭찬과 동정을 받으면 인간은 에너지가 채워진다. 힘이 생긴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비움의 반대이다. 그러면 빈자리는 곧 다시 가득 차고, 은총이 들어올 자리는 사라진다.
보상이 없는 시간. 즉 결핍의 시간이 필요하다. 자기 수행. 강한 중력이 이끄는 보상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기 비움의 시간.
- 빈자리가 있는 세계의 표상이 있어야만 신이 필요해진다. 이것은 악을 상정한다.
>> 표상 : 상징
빈자리가 있는 세계. 결핍이 있고 부재가 있는 세계.
빈자리, 결핍을 인정하는 것은 이 세계에 결핍, 악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먄약 빈자리가 없는 세계라면, 결핍이 없고 고통도 없고 악도 없는 세계라면 신이 필요하지 않다. 완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빈자리를 싫어하기 때문에 자꾸 채우려고한다.
현실 세계는 빈자리가 있는 세계. 이 결핍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계속 빈자리를 채우려고 한다.
이것은 진정한 채움이 아니며, 빈자리를 만들어 은총으로 채워야 한다. 신이 필요하다.
-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빈자리를 견디기, 따라서 죽음을 받아들이기를 의미한다. 진리는 죽음 쪽에 있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 있는 그대로 견디고 이해하는 것. 억지로 채우지 않는 것.
인간은 자아 상실, 자아의 붕괴같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존심, 권력, 인정으로 채우려고 한다.
진리를 사랑하는 것은 '부족한 나'에 집착하지 않고 벗어나는 것. 자기 중심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것.
나의 무너질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
결핍을 인정하고 자아가 약화되어도 받아들이는 것.진리는 자기 보존이 아닌 자아 소멸의 방향에 있다.
4. 집착에서 벗어나기
20260316
-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나려면 불행을 겪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위안이 없는 불행을 겪어야 한다.
단순히 불행을 겪는 것만으로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위안이 없는 불행. 만약 고통 속에서 위안을 찾는다면 그것은 자기 보상. 그러면 자아와 집착은 그대로 유지된다.
고통 자체가 아닌 '위안 없는 고통'만이 집착을 버리게 한다.
- "그는 본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자신을 비우셨고". 이 세상을 벗어던질 것. 노예의 본성을 취할 것. 시간과 공간의 한 점으로 작아질 것. 무無에 이를 것.
예수님을 말하는 것일까. 신조차도 자신을 비운다. 진리에 가까워지기 위해.
이 세상. 세속적인 욕망을 모두 버리고.
노예의 본성. 권력과 욕망을 버리고.
자아가 사라진 상태. 無에 이르기.
- 이 세상의 상상적 지배력에서 벗어날 것. 절대적 고독. 비로소 우리는 세상의 진리를 갖게 된다.
상상적 지배. 인간이 만들어낸 의미와 해석에 따른 지배. 권력. 명예. 사회적 성공 같은 것들.
이것들로부터 벗어나면 절대적 고독이 찾아오고 세상의 진리를 갖게 된다. 세상을 그대로 볼 수 있게 된다.
- 은총 아닌 모든 것을 포기할 것. 은총을 갈구하지 말 것.
은총만이 인간을 구원해주지만 그 은총을 갈구하는 순간 그것도 집착이 되고 자기보상이 된다.
- 욕망의 멸각(불교) 혹은 집착을 벗어나기 ㅡ 혹은 아모르 파티 ㅡ 혹은 절대적 선을 향한 욕망. 모두 같다. 욕망 안에 든 것, 목적지향성 안에 든 것을 비우기, 빈 채로 욕망하기, 소망 없이 욕망하기.
- 우리의 욕망을 모든 재화에서 떼어낼 것. 그리고 기다릴 것. 그 기다림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이 증명한다. 그럴 때 우리는 절대적인 선에 이르게 된다.
집착, 욕망 중심의 자아를 비워낼 것. 자기 비움.
특정 대상을 향한 욕망이 아닌 빈자리를 만들고 그 채로 기다릴 것. 그러면 은총이 채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 선은 우리에게 무無이다. 그 어떤 것도 선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무가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에 비하면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실재적이다.
선은 우리에게 무이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절대적 선을 볼 수 없다. 이 세상에 완전한 선은 없다.
그러나 볼 수 없다고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보고 있는, 현실에 있는 것들이 더 불완전하다.
- 빈자리를 채우고 고뇌를 달래주는 믿음들을 물리칠 것.
- 모든 일을 관장하는 신의 섭리가 있다는 믿음. 한마디로 사람들이 종교에서 얻으려 하는 위안들을 물리칠 것.
- 사랑은 위안이 아니다. 사랑은 빛이다.
우리가 만든 빈자리를 은총이 자리하기 전에 자기 위안으로 채우면 안 된다. 고뇌를 달래주는 믿음을 물리쳐야 한다.'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신의 계획이다'하는 식의 자기 위안들을 멀리해야 한다.고통을 정당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 고통을 설명하거나 해석을 붙이지 않아야 한다.사랑은 위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빛이다. 진리를 볼 수 있게 밝혀주는 힘이다.
- 세상의 실재는 우리의 집착으로 만들어진다. 세상의 실재는 우리가 세상의 사물들 속에 옮겨놓는 자아의 실재이다.
이 세상의 중요한 것들, 우리의 관계나 성공, 권력은 우리의 집착에서 만들어진다.
그것들은 그냥 존재한다. 그러나 집착은 그것들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도록 만든다.
- 집착이란 결국 실재감의 부족이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고 집착하는 것은 만일 소유하지 않으면 그 사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도시가 사라져버린 것과 자신들이 그 도시에서 추방되어 다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이 완전히 다른 일임을 절실하게 느끼지 못한다.
사람은, 존재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유하려 한다.
소유하지 않으면 사라진다고 믿는다. 사라질까봐 두려워서 욕망하고 집착한다.
도시에서 추방되어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여긴다. 내가 닿지 못하면, 실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그래서 소유하려고 집착한다.
-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할 때마다, 가능한 모든 불행을 그려볼 것.
당신의 뜻. 성공이나 행복뿐만 아니라 모든 불행까지도 당신의 뜻 속에 포함시켜야 진정 신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어떤 불행까지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 스스로를 죽이는 두 가지 방법. 자살 또는 집착을 버리기.
- 사랑하는 모든 것을 생각으로 죽이기.
- 그러나 꼭 사랑하는 것만을 죽일 것.
-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지 말 것. 한 인간 앞에서 그가 누구이든 영원하기를 바라거나 죽기를 바라지 말 것.
자아의 소멸. 집착의 소멸.
사랑하는 모든 것을 생각으로 죽이기. 실제로 파괴하는 것이 아닌 내 생각 속에서 죽이기. 집착을 버리기.
집착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만 생기므로, 사랑하는 것만을 생각으로 죽일 것.
인간은 사랑하는 것이 어떤 형태로든 영원하길 바란다. 하지만 영원하기를 바라지 말 것. 영원하길 바라고 죽길 바라는 순간 그것은 집착이 된다.
언제든 사라질 수도, 떠날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것.
-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신을 사랑하면, 그때 신이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보상이나 보복때문에 사랑하지 말 것.
존재 여부와 상관없이 신을 사랑할 때, 그때 신이 존재를 드러낸다.
5. 채우는 상상력
20260317
- 상상력은 은총이 들어올 만한 모든 틈을 끊임없이 메운다.
- 모든 (받아들여지지않은) 빈자리는 증오, 쓰라림, 고뇌, 원한을 낳는다. 우리는 자신이 증오하는 것이 해악을 겪기를 바라고, 그렇게 상상한다. 그러면 균형이 회복된다.
인간은 상상한다. 결핍이나 공허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빈자리를 상상력으로 채운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낳고 우리는 증오하는 대상이 해악을 겪는 것을 상상하며 내 마음속에서 균형을 맞다.
-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평형추를 필요로 하지만, 은총이 아닌 평형추는 모두 거짓일 뿐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 또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보상이나 위안 같은 것을 상상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이다.
- 빈자리를 채우는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거짓이다. 그것은 삼차원을 제거한다. 실재하는 사물들만이 삼차원이기 때문이다.
- 실제로 일어나고 있지만 어떤 의미로는 여전히 상상인 것들을 정의내려볼 것. 전쟁, 범죄, 복수, 극단적인 불행.
상상력은 삼차원이 아니기 때문에 거짓이다. 현실이 아닌 단순화된 세계.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지만, 인간의 그릇된. 왜곡된 상상력에 의해 일어나는 일들. 전쟁. 범죄. 복수. 극단적인 불행.
- 어떤 상황에서든 상상력이 정지되면 빈자리가 생긴다(마음이 가난한 자)
- 어떤 상황에서든 상상력은 빈자리를 채울 수 있다(하지만 때로 많이 낮아지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상상을 멈출 때 우리는 결핍을 그대로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마음이 가난한 상태이다.
상상력은 결핍과 공허를 채워주지만 그만큼 낮아진다. 왜곡된다.
-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우주는 가득 차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인간은 공허, 결핍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 세계가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믿는다.
6. 시간을 포기하기
20260317
- 시간은 영원의 한 형상이다. 하지만 영원의 대용품이기도 하다.
시간은 영원을 흉내내는 어떤 것. 그러나 영원을 대신하는 것이기도 하다.
영원. 영원한 것. 바뀌지 않는 것. 시간에 의존하지 않는 것. 진실.
- 미래는 빈자리를 채워준다. 때로 과거 역시 그런 역할을 한다(나는 ~였다. 나는 ~를 했다 등). 너무 불행해서 행복을 떠올리는 것조차 견딜 수 없을 때도 있다. 불행이 과거를 빼앗아간 것이다("그보다 큰 괴로움은 없으니...").
- 과거와 미래는 상상의 고양을 위한 무한한 자리를 제공함으로써 불행이 주는 유익한 효과를 가로막는다.
우리는 결핍과 공허를 견디지 못해 미래를 상상한다. 과거도 마찬가지.
"나중에 잘 될 거야. 이걸 갖게 되면 행복해질 거야." 또는 "예전에 이랬었어. 난 잘 나갔었어." 등등.
과거와 미래를 상상하는 것에 기대어 빈자리를 내어주면, 우리가 맞닥뜨려야하는 고통을 올바로 직면하지 못한다.
- 우리 안에서 궁극성에 부합하는 욕망의 뾰족한 끝을 현재로 향하게 하면, 그것은 현재를 꿰뚫어 영원에 이를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절망의 쓰임새다. 절망은 우리가 미래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
우리 안의 욕망을 현재로 향하게 하면 영원에 이를 수 있다. 더 깊은 차원.
절망은 미래로 도망치는 길을 막아 현재에 머물게 한다. 절망. "아무리 해도 바뀌지 않을 거야."와 같은 절망.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절망. 현실을 직시할 수밖에 없는 상태.
- 기다리던 기쁨이 왔는데 실망할 때가 있다. 미래로부터 기다렸기 때문이다. 미래는 있게 되는 순간에 이미 현재이다. 미래는 계속 미래인 채로 있어야 한다. 영원만이 치유할 수 있는 부조리.
미래에 대한 기대는 항상 현재가 되는 순간 무너질 수밖에 없다.
기대했던 미래가 현실이 되는 순간 더 이상 기대가 아니다.
"이것만 끝나면 행복해질거야"했지만, 막상 기대했던 것처럼 행복하지 않은, 현재가 되어버린 미래의 기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시간에 흔들리지 않는 영원. 영원만이 치유할 수 있다.
7. 대상 없이 욕망하기
20260317
- 정화는 선을 욕심과 떼어놓는 것이다.
좋은 것을 바라는 마음에서 욕심과 집착을 빼는 것이 정화다.
- 욕망의 대상에서 에너지를 떼어놓기 위해 욕망의 근원으로 내려갈 것. 그곳에서 욕망은 에너지로서 진짜다. 대상이 가짜다. 하지만 욕망과 대상이 분리될 때 영혼은 형용하기 힘든 아픔을 겪는다.
욕망의 근원. 욕망의 대상이 아닌 욕망 자체의 에너지를 봐야 한다.
욕망의 대상은 허상일 뿐. 욕망 그 자체만이 진짜다.
하지만 그것을 분리하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 음식물을 상상해도 굶주림 자체는 실재한다. 굶주림을 움켜쥘 것. 죽은 사람의 있음은 상상이지만, 그의 없음은 분명한 실재다. 부재는 죽은 사람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상상은 허구지만 결핍과 부재, 공허는 실제로 경험된다. 우리는 상상이 아닌 결핍 그 자체를 직면해야 한다. 움켜쥐어야 한다.
- 지팡이나 다른 연장의 끝으로 대상을 지각하는 것이 원래의 촉각과 다르듯이, 참된 행복은 다른 감각으로 감지된다. 그 다른 감각을 지니려면 몸과 영혼을 다한 훈련을 통해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
참된 행복은 다른 감각을 통해 지각할 수 있다.
몸과 영혼을 다한 훈련을 통해 새로운 감각을 익혀야 참된 행복을 감지할 수 있다.
- 사람에게 애원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 체계를 타인의 정신에 강요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다. 신에게 하는 애원은 그 반대다. 신에게 하는 애원은 신의 가치를 자기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다.
인간에게 애원하는 것. 매달리는 것은 자신의 기준을 강요하려는 절망적인 시도이다. 타인을 통제하려고 하는 것.
하지만 신에게 매달리는 것은 자기 자신을 바꾸려는 태도이다. 신의 가치를 나의 영혼 속에 받아들이려는 시도이다.
8. 자아
20260320
-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다. 우연히 모든 것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라고 말할 수 있는 힘만이 예외다. 바로 그것을 신에게 바쳐야 한다. 즉, 파괴해야 한다. 다른 자유 행위가 허락되지 않은 우리에게 '나'의 파괴만은 예외다.
- 우리 스스로 '나'를 파괴하기 시작하면 그 어떤 불행도 더는 우리에게 해를 끼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소유하는 건 언젠가는 잃게 된다. 진짜 내 것이라 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그것을 신에게 바치고 파괴해야 한다. '나'를 내려놓고 자아를 없애야 한다.
'나'가 사라지면 불행이 해를 끼칠 주체도 사라지기 때문에 고통이 무의미해진다.
- 지옥은 가짜 심연이다. 지옥은 겉모습일 뿐이다.
- 순전히 밖으로부터의 '나'의 파괴는 생지옥의 고통이다. 밖으로부터의 파괴에 영혼이 사랑으로 관여하는 것이 속죄의 고통이다. 사랑으로 자기 자신을 완전히 비운 후에 영혼 안에 신의 부재를 만드는 것이 대속의 고통이다.
>> 대속의 고통 : 다른 사람의 죄나 잘못, 혹은 책임을 대신 짊어지면서 겪는 고통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지옥의 모습은 겉모습일 뿐이다. 밖으로부터 내 자신이 파괴되는 것이 진정한 지옥이다.
타인 때문에 '내'가 강제로 무너지는 건 극한의 고통이다. 그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속죄라는 의미가 생긴다.
그리고 내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를 견디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을 대신해 짊어진 대속의 고통이다.
신이 없는 상태까지도 사랑으로 견디는 것.
- 불행을 겪는 동안 생의 본능은 집착이 뽑힌 뒤에도 살아남아서, 식물이 덩굴을 감듯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에 매달린다. 이 상태에서는 감사(저급한 형태가 아닌 감사이다.)와 올바름이 불가능하다.
- 그렇게 살아남으려는 집착이 다른 모든 집착을 대신할 때 극단의 불행이 시작된다. 집착이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낸다. 자기 자신 외에 그 어떤 대상도 없다. 지옥.
- 그럴 때 죽음을 받아들이면 집착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인간은 불행을 겪을 때 어떤 것에 매달리려고 한다. 이러한 집착에 사로잡혀있는 상태에서는 감사와 올바름 즉 선한 행동이 불가능하다. 살아남으려는 집착. '나'의 안위만 중요해지는 순간 극단의 불행이 시작된다. '나'만 남는 상태.
모든 걸 내려놓는다면. 자기 비움을 실천한다면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 아무리 엄청난 고통이라도 뿌리를 남겨두는 고통이라면 생지옥과는 전혀 다르다.
- 뿌리 뽑힌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었을 때 그 대가로 악의적인 태도, 배은망덕, 배신이 돌아올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그들의 불행을 아주 조금 함께 겪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 우리는 한정된 범위 안에서 그들의 불행을 함께 겪을 의무가 있다. 그리고 그럴 힘이 있다.
뿌리. 희망이 남아있는 고통은 생지옥이 아니다.
희망이 사라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을 때 악한 것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불행을 함께 겪을 의무가 있다.
- 불행을 겪는 사람의 기질이 약할수록 '나'의 죽음이 빠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불행이 자리잡을 때, '나'를 파괴하는 불행은 당하는 사람의 기질에 따라 가까이 혹은 멀리 놓인다.
- 불행이 얼마나 멀리 자리 잡는가는 수학적인 재능을 얼마나 타고났는가처럼 타고난 것이다.
인간마다 자아가 무너지는 속도가 다르다. 기질이 강할 수록 '나'를 파괴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은 개인의 차이일 뿐이다.
- '나'라고 불리는 것 안에 우리를 높여줄 에너지원이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 내 안의 귀중한 것은 예외 없이 나 아닌 다른 곳에서 온다.
겸손이란 내 안에 가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빈자리는 없고 과시로 가득찬다.
다른 곳에서 오는 것. 내 스스로 만든 나만의 것이 아닌, 외부에서 받은 것이다. 내게 주어진 것.
9. 탈脫창조
20260320
- 탈脫창조. 창조된 것을 창조되지 않은 것이 되게 하기.
- 파괴. 창조된 것을 무가 되게 하기. 탈창조의 잘못된 대용품.
탈창조. 나를 비움으로써, 내 자아가 사라짐으로써 은총이 들어올 공간, 빈자리를 만들 것.
파괴. 나 자신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 탈창조와 비슷해보이지만 잘못된 것.
- 창조는 사랑의 행위이고, 영원하다.
- 우리는 밑빠진 독이다. 밑바닥이 있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한 그렇다.
신이 세상을 만든 것은 사랑이고 영원하다.
밑빠진 독.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의 욕구. 우리 스스로 밑바닥이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면, 겸손하지 못하면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허망한 삶을 살게 된다.
- 자연적인 능력으로 파악되는 것은 모두 가정假定이다. 초자연적 사랑만이 제대로 정립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도 창조에 참여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탈창조함으로써 세계의 창조에 참여한다.
자연적인 능력으로 파악되는 것. 인간의 감각이나 인간의 사고로 이해한 것들은 모두 진리가 아닌 임시로 정한 것이다. 인간의 해석.
초자연적 사랑, 신적 차원의 사랑만이 진리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자기 비움을 통해 창조에 참여한다. 진리에 닿을 수 있다.
탈창조. 우리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인간 기준으로 세계를 왜곡해서 바라보지 않음으로써, 세계의 진리가 드러난다.
- 우리는 가장 낮게 있는 형상을 찾아야 한다.
- 우리 안에서 낮은 것이 아래로 내려가길. 그리하여 높은 것이 더 위로 올라가길. 우리는 거꾸로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낮은 곳(가난, 고통)에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세속적인 것(낮은 것들)을 위로 올리고, 가치가 높은 것을 아래로 내린다. 우리가 뒤집혀 있기 때문이다. 낮은 것은 더 낮은 곳으로, 높은 것은 더 높은 곳으로 질서를 바로잡아야 한다.
- 밀알 하나가 죽지 않으면... * 밀알이 죽어 그 안에 담긴 에너지가 풀려나서 다른 결합물들을 낳아야 한다.
>> 요한복음 12장 24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 마찬가지로, 우리는 죽어야 한다. 그래야 매여 있는 에너지를 풀어줄 수 있고, 사물들의 진정한 관계를 가능하게 할 자유로운 에너지를 소유할 수 있다.
밀알이 그대로 있으면 씨앗 한 개로 끝나지만, 떨어져 죽으면 땅에 심어져 새로운 생명, 수십 개의 밀알로 확장된다.
내 자신을 버리지 못하면 그대로 끝나고, 내 자신을 내려놓고 전부 비우면 더 큰 결과를 얻는다.
- 불행 때문에 고통을 겪고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 인간의 비참함을 절실히 알게 되고, 그 앎은 지혜로 통하는 문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일이 닥치든, 어떻게 내가 고통이 너무 크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불행으로 인한 고통을 겪으면 인간의 한계. 밑바닥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지혜로 통하는 문, 현실을 제대로 보게 만드는 계기.
결국 나의 성장의 기회가 된다.
- 그러니까 실제의 불행에서보다 고뇌가 더 커야 한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조각나서도 안되고, 희망을 향해서도 안 된다.
고통을 잊으려고 자기 위안, 희망을 가지면 안된다. 고통 그 자체를 온전히 겪어야 탈창조에 이를 수 있다.
- 신의 현존.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신은 창조자이므로 협력이 필요한 신의 현존은 창조자로서의 신이 아니라 성령으로서의 신의 현존이다. 첫번째 현존은 창조의 현존이며 두번째 현존은 탈창조의 현존이다(신은 우리 없이 우리를 창조했지만, 우리 없이 우리를 구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창조의 현존. 신이 세상을 만든 힘. 탈창조의 현존. 신은 우리를 강제로 구원하지 않는다. 인간의 존재 자체는 신의 뜻이지만 구원은 인간의 자발적인 자기 비움과 동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10. 사라지기
20260321
- '나'는 신의 빛을 가로막는 죄와 과오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존재라고 생각한다.
신은 밝은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 인간의 자아는 그 빛을 가로막아 그림자를 만든다. 인간은 그 그림자가 나의 존재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세상의 진리를 보는 데에 장애물일 뿐이다.
- 다른 이들이 나에게 애정을 갖는다는 생각은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신이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창조의 광경을 사랑하는 신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장막으로 그 광경을 가리고 있다. 신이 볼 수 있도록 나는 물러서야 한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사랑받는다고 믿는 것은 착각이다. 내가 잘나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다. 신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내가 있는 자리에서 보이는 세계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의 자아가 그 광경을 가린다. 내 자아를 비워야 신이 세계를 온전히 볼 수 있다.
- 내가 사라지고 없을 때의 풍경을 그려볼 것.
- 나는 어디 있든 호흡과 심장 박동으로 하늘과 땅의 고요한 침묵을 더럽힌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똑같이 돌아간다. '나'는 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질서를 깨뜨린다. 이 세계의 완벽한 침묵과 질서에 '나'의 자아는 소음이다.
11. 필연과 복종
20260323
- 태양은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똑같이 빛난다. 신은 스스로 필연이 된다. 필연의 두 가지 얼굴. 필연을 행하기와 필연을 견디기. 태양과 십자가.
세상은 인간의 도덕적 잣대와 상관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돌아간다. 신은 피할 수 없는, 반드시 있는 존재. 필연에는 반드시 해야하는 것과 참아야하는 것 두 가지가 있다. 실천하거나 고통을 견디거나.
- 복종은 지고의 미덕이다. 필연을 사랑하기. 필연은 한 개인에게 있어서 가장 낮은 것이다(속박, 힘, "가혹한 운명"). 우주의 필연이 그로부터 풀어준다.
>> 지고 : 가장 높고 뛰어남.
내 고집을 버리고 복종하는 것이 최고의 미덕.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기.
개인의 입장에서 필연은, 내게 닥친 필연은 속박처럼 느껴지지만 우주의 질서임을 깨닫는 순간 자유로워진다.
- 어떤 행위든 목표가 아니라 추진력의 관점에서 볼 것. 어떤 목적으로가 아니라 어디에서 왔는가를 볼 것.
- "헐벗을 때 입을 것을 주었으며..." 그런 행위는 그것을 한 사람들의 상태를 알려준다. 그들은 배고픈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리스도를 위해 한 일이 아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연민이 있었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그런 식으로, 거의 어쩔 수 없이, 부끄러움과 후회까지 품은 채로 행한 선이 순수하다. 절대적으로 순수한 선은 우리의 의지를 완전히 벗어난다. 선은 초월적이다. 신이 선이다.
무엇을 얻으려는, 보상을 바라는 행동이 아닌 어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인지를 살펴볼 것. 진심.
진정으로 선한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거나 종교적인 의무로 행동하는 것이 아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뿌듯함조차 없는 나의 자아를 완전히 잊고 행한 선이 절대적으로 순수한 선이다.
- 일반적으로 '신을 위하여'라는 것은 잘못되 표현이다. 신은 여격與格으로 놓일 수 없다.
>> 여격 : 문장에서 '~에게, ~한테'처럼 쓰이는 자리
- 신을 위하여 이웃에게로 가지 말고, 사수가 쏜 화살이 표적을 향해 가듯이 신에게 떠밀려 이웃에게 갈 것.
신은 내가 무엇을 바치는, 보상을 얻기 위해 행하는 대상이 아니다.
내 의지로 "신을 위해 봉사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 복종. 두 가지 복종이 있다. 중력에 복종할 수 있고, 사물들의 관계에 복종할 수 있다. 첫 번째의 경우 빈자리를 채우는 상상력이 떠미는 대로 행한다. 그리고 선과 신을 포함하여 대부분 진실임직한 이름표를 모두 붙일 수 있다. 빈자리를 채우는 상상력의 활동을 멈춰 세우고 사물들의 관계에 주의력을 고정하면, 필연이 나타난다. 우리는 그 필연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 복종은 유일하고 순수한 동인이다. 오로지 복종만이 행동에 대해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 동인 :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일으키게 하는 원인, 힘
복종의 두 가지 종류. 인간의 본능대로 중력에 이끌려 사는 것. 또는 내 욕망을 비우고 세상의 진리에 집중하며 사는 것.진실임직한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나의 행동을 선한 행동인 것처럼 포장하는 것.진실로 복종하는 사람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
- 신과의 올바른 관계는 묵상에 있어서는 사랑이며, 행동에 있어서는 노예 상태이다. 뒤섞지 말 것. 사랑으로서 묵상하고, 노예로서 해동할 것.
생각할 때는 신을 뜨겁게 사랑하고, 행동할 때는 신의 뜻에 절대 복종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겸손.
12. 환상
20260323
- 사람들은 어떤 것이 좋다고 믿기에 그쪽으로 향하고, 그것이 필요해져서 계속 매여 있게 된다.
- 이 세상 사물들에 관련된 환상은 그 존재가 아니라 가치에 관련된다.
- 우리는 선을 모방하는 그림자만을 소유한다. 또한 그 선과 관련하여 우리는 사슬로 묶여 갇혀 있다(집착).
인간은 어떤 것이 좋아보여서 시작하게 되지만 곧 그것은 집착이 된다. 중독.
환상. 대상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좋다고 믿는 인간의 생각이 문제이다.
우리는 진짜 선이 아니라 '선'처럼 보이는 것들을 가지며, 그것에 집착하여 스스로를 구속한다.
- 수전노에게 재물은 선의 모방의 그림자다.
>> 수전노 : 돈을 지나치게 아끼고 쓰지 않으려는 사람. 구두쇠.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선을 따라하는 것, 거짓된 것을 행복 이라 믿는 것이다.
- 문제는 언제나 시간과의 관계이다. 시간을 소유한다는환상을 버릴 것. 육체를 가질 것.
내게 시간이 계속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말 것. 내일이 올 것이라고 당연하게 여기지 말 것.
- 내 안의 낮은 부분들이 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지나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신이 아니다.
- 우리가 목마르고 굶주리듯, 내 안의 낮은 부분들이 사랑하길. 가장 높은 것만이 충족될 권리가 있다.
- 육신은 신을 사랑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위험하다. 하지만 육신이 무턱대고 신을 사랑하려 하는 것도 위험하다.
인간의 본능은 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감정적으로 집착하여 사랑하면 안 된다.
인간의 몸은 편한 것을 찾기 때문에 게을러질 수 있지만 무턱대고 신을 사랑하면 광신도처럼 집착하게될 수 있다.
- 도덕과 문학. 우리의 실제 삶은 4분의 3 이상이 상상과 허구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선과 악을 진짜로 접하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다.
우리는 대부분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살아간다. 각자 보고 싶은 대로 보며 살아간다.
- 자연이 내 안에서 기계적으로 하는 일을 내가 하는 일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성령이 한다고 믿는 것은 더 나쁘다. 진실에서 더 멀어진다.
- 자신과 위대한 것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묵상함으로써 나를 그 위대함의 도구로 삼기.
인간의 본능적인 반응을 나의 의지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성령의 뜻이라고 포장하는 것도 나쁘다. 신을 탓하면 안 된다.
신과 나 사이의 차이를 받아들이고, 겸손해질 때 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 인간 문명의 몇 세기든 개인의 몇 년 또는 몇 십 년이든, 시간의 지속은 다윈의 말대로 적응하지 못한 것을 도태시킨다. 모든 것에 적응하면 영원하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경험이라 일컫는 것의 진가이다. 하지만 거짓이 갑옷이 될 수 있다. 인간은 거짓을 갑옷으로 삼아 그 갑옷 없이는 죽음을 맞게 될 사건들에서 살아남게 해준다(자존심은 치욕을 겪고 살아남는다). 그 갑옷은 적응하지 못하는 자가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분비해낸 분비물이다(자존심은 치욕을 견디는 동안 내면의 거짓을 두껍게 쌓아간다).
진리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거짓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한다.자존심. 나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어서 만들어낸 마음의 찌꺼기.
- 죄를 만드는 것은 쾌락의 추구와 노력에 대한 거부감이 아니라, 신에 대한 두려움이다. 인간은 신과 마주하면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알고, 죽음을 원하지 않는다. 그릭 죄를 지으면 신과 마주하는 일을 효과적으로 피할 수 있음을 안다.
- 옳지 못한 전쟁에 핑계가 필요한 것처럼, 죄에는 거짓 선이 필요하다. 자신이 악을 향해 가고 있다는 생각은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신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숨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죄를 지을 때도 자기 합리화를 한다.
13. 우상숭배
20260324
- 우상 숭배는 인간이 절대적인 선을 갈망하지만 초자연적인 주의력을 갖지 못했거나 주의력이 자라나기까지 기다릴 인내심이 없을 때 생겨난다.
- 우상이 없으면 보통은 거의 날마다 빈 채로 고생해야 한다.
- 그래서 동굴 속에서 살아갈 때 우상 숭배가 꼭 필요하다. 우상 숭배는 더없이 훌륭한 인간의 지성과 선의도 좁은 한계 속에 가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절대적인 선을 원한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주의력이 없거나 인내심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면 우상 숭배가 생긴다. 인간은 빈 자리를 공허해하며 고통스러워 하기 때문에 우상(가짜 위안)으로 채우려고 한다.
동굴. 삭막한 현실에서 버티려면 거짓된 위안이라도 필요하다. 그러나 그렇게 버티는 것은 인간을 좁은 틀 안에 가두는 것과 다름 없다.
- 사고는 계속 변하고, 정념과 공상과 피로에 순종한다. 행동은 매일 긴 시간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행동은 사고를 벗어난, 즉 관계들을 벗어난 동기들이 필요하다. 바로 우상이다.
우리의 생각은 시시각각 변한다. 상상과 피곤함에 따라 바뀐다. 하지만 행동은 매일 매일 꾸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상이 필요하다. 우상을 절대적 진리로 여겨야 복잡한 생각 없이 그저 따르고 행하게 된다.
-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 사랑하는 것이 어느 높이에 놓이는지, 사랑이 어느 정도 집중 혹은 분산되어 있는지가 다를 뿐이다. 그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인간은 항상 어떤 것에 헌신한다. 다만 대상의 수준이나 정도가 다를 뿐이다.
시몬 베유의 철학.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투영한 '대상'을 사랑한다.
- 인간은 이기주의자가 되고 싶겠지만, 그럴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의 비참함이 갖는 가장 놀라운 특성이며, 인간의 위대함의 원천이다.
- 인간은 항상 어떤 질서에 헌신한다.
- 우리는 겸손을 얻으려 하지 않아도 된다. 겸손은 우리 안에 있다. 단지 우리는 거짓 신들 앞에 겸손하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싶어 하지만 결국 그럴 수 없다. '나' 자신만으로 존재할 수 없어서 비참하지만 그것은 곧 무언가를 향해 '나'를 내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질서에 헌신한다. 독립적이지 않으며 옳든 그르든 항상 어딘가에 속해 질서를 따른다.
인간은 스스로를 오만하다고 여기지만, 사실 이미 안에 겸손함이 있다. 그러나 겸손해야하는 대상이 잘못된 것이다. 돈, 권력 앞에 겸손할 게 아니라 진리 앞에 겸손해야 한다.
14. 사랑
20260324
- 사랑은 우리의 비참함을 드러내는 징표이다. 신은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할 수 있다.우리는 다른 것만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가진 결핍과 한계를 드러내는 징표이다.
신은 그 자체로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것을 사랑한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다른 무언가를 원하게 된다.
-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을 사랑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이러한 동기가 없다면 어떻게 스스로를 사랑할까?
- 이 에움길이 없으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
>> 에움길 : 멀리 돌아가는 길
신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보답처럼 신을 사랑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이러한 동기가 있어야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다.
- 초자연의 사랑은 오직 피조물들에게만 가닿고, 오직 신을 향해 간다. 신은 피조물들만 사랑하고(우리가 사랑할 다른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오직 매개체로서 사랑한다. 남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일에는 자기 자신을 남처럼 사랑한다는 반대급부가 포함된다.
- 기쁨과 고통이 동일한 감사를 불러올 때, 신을 향한 사랑은 순수하다.
>> 반대급부 : 어떤 일에 대응하여 얻게 되는 이익이나 보상
초자연적인 사랑은 피조물들에 영향을 미치며, 신을 향한다. 신에게 향하는 사랑에서 결국 피조물은 매개체일 뿐이다.
인간이 남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면 스스로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기쁨과 고통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을 때
- 영혼이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주는 사랑을 원한다면 신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해야 한다.
- 사랑은 언제나 더 멀리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계를 넘어서면 사랑은 증오로 변한다. 변하지 않으려면 다른 것이 되어야 한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자아를 비우고 고통을 감내해야한다. 상처 없는 사랑을 원한다면 그것은 신에 대한 사랑, 진정한 사랑이 아닌 세속적인 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한계를 넘어서면 그것은 집착이 되고, 증오가 된다. 그렇게 변하지 않으려면 내 욕심, 소유를 버리는 초자연적 사랑을 해야한다.
-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창조하려는 욕구는 신을 모방하려는 욕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 신성으로 기울어진 성향이다. 하늘 너머로 보이는 전범을 따르지 않는 한에는...
우리는 사랑하는 대상을 나의 취향에 맞게 바꾸려고 한다. 그것은 신이 되려는 오만이다.
- 피조물들을 위한 상상의 사랑. 우리는 집착의 대상에 끈으로 매여 있고, 그 끈은 언제든 끊어질 수 있다.
- 우리는 실제의 신에게는 매여 있지 않고, 따라서 끊어질 수 있는 끈이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의 신이 우리 안으로 들어온다. 오직 실제의 신만이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있다. 다른 모든 것은 밖에 머물고, 우리는 그 끈에 새겨진 긴장의 정도와 방향 변화를 통해 그것을 알 뿐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상상의 사랑은 불안정하다.
인간과 신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우리 안으로 신이 들어온다. 세속적인 것은 모두 밖에 있으며 우리 마음 속을 살펴야 신의 존재를 경험할 수 있다.
- 사랑은 실재가 필요하다. 육체라는겉모습을 통해 상상의 존재를 사랑할 경우, 어느 날 깨닫게 될 때 그보다 더 가혹한 일이 있을까? 죽음보다 가혹하다. 죽음은 적어도 사랑받은 사람이 존재했었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 상상으로 사랑을 키운 죄에 대한 벌이다.
실재하지 않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언젠가 큰 고통을 겪는다. 대상의 실체가 아닌 내 상상으로 사랑하다가 어느날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알게되었을 때 느끼는 배신감은 죽음보다 크다. 진실을 보지 않고 환상을 사랑한 대가.
- 우정을, 정확히는 우정에 대한 몽상을 물리치는 법을 배울 것.
- 우정은 잉여로 주어지는 것 중 하나다. 우정에 대한 꿈은 전부 깨져야 한다. 그대가 아직까지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것은 우연이 아니니... 고독을 피하려는 바람은 비겁하다. 우정은 추구할 수도 꿈꿀 수도 바랄 수도 없는 것이다. 우정은 행해지는 것이다(우정은 하나의 미덕이다). 불순하고 혼돈스러운 여분의 감정을 없앨 것. 그뿐이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우정 또한 몽상(나의 상상)을 물리쳐야 한다."어딘가 완벽한 친구가 있을 거야"하는 상상은 나의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피하려는 비겁한 행동이다.우정은 추구하거나 꿈꾸는 것이 아닌 나의 행동에서 나타나는 미덕이다.
15. 악
20260325
- 창조. 조각나서 악 속에 흩어진 선.
- 악에는 한계가 없다. 그러나 끝이 없지는 않다.
- 끝없음만이 한계 없음에 한계를 지을 수 있다.
신이 우리를 창조하는 것은 신의 일부를 비워낸 것. 선은 이 세상 속에 파편화되어 흩어졌다.
악은 질서가 없기에 한계도 없지만, 결국 신의 피조물이기 때문에 끝은 있다. 끝없음은 신의 영역이고, 그것만이 악에게 질서를 부여할 수 있다.
- 선은 악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악은 여러 개이고 불완전한 조각들이지만, 선은 하나이다. 악은 피상적이고, 선은 불가사의하다. 악은 행동에 있지만 선은 비非행동에, 행하지 않는 행동에 있다.
- 악을 행할 때는 정작 악을 알 수 없다. 악은 빛을 피하기 때문이다.
악은 다양하지만 선은 하나이다. 악은 요란하고 겉에 드러나는 행동.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드러나지만
선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나의 자아를 버리고 비워져 있는 상태이다.
악은 진리, 인식을 피하기 때문에 행할 때에 그게 악인지 자각할 수 없다.
- 어떤 것이 선한 줄 알면서 선하기 때문에 증오하면 성령에 맞서는 죄를 짓게 된다. 선으로 향할 때마다 우리는 저항의 형태로 그런 죄를 느낀다. 선과 접촉하면 선과 악 사이의 거리를 알게 되고, 선에 동화되고자 하는 힘겨운 노력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고통이고,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그 두려움은 아마도 선과의 접촉이 실재함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선함을 증오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다. 선으로 향할 때 나의 자아가 비워지고 파괴되는 고통이 수반된다. 그 고통을 느끼는 것이 선이 실재한다는 증거가 된다.
- 계속해서 나쁜 것만 상상하는 것은 일종의 비겁함이다. 실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 기쁨을 느끼고 알고 성장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어떤 일들이 가능하다고 여기고 상상하기만 해도 이미 그 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어떤 일의 가능성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덕에 꼭 필요한 일과는 다르다). 그렇게 되는 원인은 호기심이다. 어떤 생각들은 물리쳐야 한다(떠올리지 말라는 게 아니라, 계속 붙잡고 있어서는 안 된다). 생각하지 말 것.
상상. 현재의 고통을 회피하고 거짓 위안을 얻는 자기 합리화. 그것은 비겁함이다.
죄가 될만한 것을 상상하는 것은 그 자체로 행한 것과다름 없다. 영혼을 오염시킨다. 호기심. 계속 붙잡으려 하지말 것.
- 신은 가능한 최선의 세계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모든 단계의 선과 악을 포함하는 세계를 창조했다. 우리는 그 세계가 최악인 곳에 있다. 그곳을 넘어가면 악도 죄 없음이 된다.
신은 선과 악이 뒤섞인 세계를 창조했다. 모든 선과 모든 악이 공존하는 세계. 우리가 있는 곳은 중력이 작용하는 가장 낮은 곳이다.
중력을 벗어나 신의 관점에 이르게 되면 고통과 악조차도 우주의 일부분으로서 하나의 역할이 될 뿐이다.
16. 불행
20260325
- 이 세상에 불행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천국에 있다고 믿게될 것이다.
이 세상에 고통과 불행이 없다면 인간은 오만하게도 천국에 있다고 생각하며 현실에 안주할 것이다.
고통과 불행은 인간이 신을 갈망하게 만드는 결핍의 신호이다.
- 두 가지 생각이 불행을 조금 덜어준다. 불행이 곧 끝나리라는 생각, 아니면 불행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라는 생각. 불행은 있을 수 없는 일이거나 필연적이다. 불행이 그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게는 견뎌낼 수 없다.
인간은 희망을 가지거나, 필연이라 여기는 자기합리화를 통해 자기 위안으로 불행을 덜어내려고 한다.
어떻게든 서사를 부여한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
- 지식의 원천으로서의 고통과 쾌락. 뱀은 아담과 이브에게 지식을 주었다. 세이렌은 율리시스에게 지식을 주었다. 영혼이 쾌락 속에서 지식을 얻으려다가 파멸하는 이야기들이다. 왜 그랬을까? 쾌락 속에서 지식을 얻으려 하지만 않는다면, 죄 없는 쾌락이 가능하다. 지식은 오직 고통 속에서 구해야 한다.
쾌락 속에서 얻는 지식은 인간을 오만하게 만든다. 고통 속에서 얻는 지식은 자아를 부수고 겸손하게 만든다.
진리, 진실은 고통 속에서 얻은 지식을 통해 가까이할 수 있다.
17. 폭력
20260325
- 죽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하다. 그래서 죽음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최고의 불경不敬이다. 잘못 죽기, 잘못 죽이기(어떻게 자살과 살인을 다 피할 수 있을까).
- 죽음 다음에는 사랑이다. 비슷한 문제다. 잘못된 향락도 잘못된 금욕도 안 된다. 전쟁과 에로스는 인간들이 환상을 갖게 하는 두 가지 원천이다. 이 둘이 섞일 때 가장 불순하다.
죽음은 인간이 영원함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스스로 죽거나 타인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죽음이다.
죽음의 공포와 사랑의 욕망은 인간에게 환상을 갖게 한다. 이들이 함께할 때 가장 죽음을 더럽히게 된다.
- 폭력을 효과적인 비폭력으로 점진적으로 대체하도록 애쓸 것.
- 비폭력이 좋은 것이 되려면 효과적이어야 한다.
단순히 폭력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닌 힘을 억제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실질적인 능력이 있을 때 가치가 있다.
물리적인 힘보다 더 강한 에너지를 생성해야 한다.
- 전쟁. 자기 안에 새명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지켜낼 것.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 남을 죽이지 말 것.
- 만일 누군가의 생명이 자기 생명과 이어져 있어서 하나가 죽으면 둘 다 죽게 되어 있다면, 그래도 상대가 죽기를 바랄 수 있을까? 육체와 온 영혼이 생을 갈망하면서도 진정으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때는 죽일 권리가 있다.
만약 타인을 죽여야하는 상황에서 내 자신을 도려내는 것과 같이 느낀다면 그것은 증오가 아닌 우주의 필연이 된다.
다른 생명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처럼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생각해야 한다.
18. 십자가
20230326
-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죽을 것이다. 칼을 쓰지 않는 (혹은 칼을 버리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다.
-불구자들을 낫게 하고 죽은 이들을 살아나게 한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사명 중에서 보잘것없는, 인간적인, 저급하다고 할 만한 부분이다. 초자연적인 부분은 따로 있다. 피와 땀, 인간들에게 위안을 주려 했으나 채워지지 못한 바람,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는 애원, 신에게서 버림받았다는 느낌.
폭력을 행하는 자는 결국 폭력에 의해 망한다. 폭력을 쓰지 않으면 고통을 감수해야할 것이다. 결국 세상의 폭력에 희생될 것.
병을 고치거나 살리는 건 별 것 아닌 인간적인 것이며 실제로 초자연적인 것, 정말 중요한 것은 고통과 피. 애원. 버림받음이다. 인간의 절망. 무력함.
- 의로운 자가 되기 위해서는 맨몸으로 죽어야 한다. 상상력 없이 죽어야 한다. 의로움의 전범이 되는 이는 그래서 맨몸으로 죽었다. 십자가만이 상상의 모방을 허용하지 않는다.
- 하지만 우리가 의지를 넘어선 곳까지 가기 위해서는 그 모방을 원할 수 없어야 한다. 십자가는 스스로 원할 수 없다.
>> 전범 (典範) : 본보기. 모범.
본인을 의로운 자라고 상상하는 것도 안 된다. 아무 위안도 없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의로운 자가 될 수 있다.
스스로 원해서 고통을 선택하면 자기만족이 될 수 있기에 어쩔 수 없는 수동적인 고통이어야 한다. 그래야 의지를 넘어선 곳까지 갈 수 있다.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
- 우리는 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신을 향해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진 극단의 한계에 있다. 우리 존재 속에서 신이 찢긴다. 우리는 신이 겪는 십자가형이다. 신의 사랑은 우리에게 수난이다. 어떻게 선이 고통 없이 악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악도 선을 사랑하면서 고통 받는다. 신과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고통이다.
우리는 악과 한계, 고통이 가득한 세계에 있기 때문에 신에게는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찢기는 고통이자 수난이다.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 신이 겪는 고통이다.
- 우리가 신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느낄 수 있도록 신은 십자가에 못 박힌 노예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낮은 쪽을 향한 거리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자리보다는 창조주 신의 자리에 서는 것을 상상하기가 훨씬 쉽다.
인간은 오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보다 높게 있는 것은 상상을 통해 우리를 그 위치로 쉽게 둘 수 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낮은 자리엔 우리 자신을 두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면서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신이 낮은 곳으로 내려와야 비로소 인간이 신과의 거리를 느낄 수 있게 된다.
19. 저울과 지렛대
20260326
- 저울로서의, 지렛대로서의 십자가. 상승의 조건으로서의 하강. 땅으로 내려오는 하늘은 땅을 하늘로 들어올린다.
- 지렛대. 올리고 싶을 때는 낮출 것.
-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와 마찬가지다.
저울. 양팔 저울을 말하는 거겠지. 그리고 지렛대.
한 쪽을 눌러야 다른 한쪽이 올라간다.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높아질 수 있다.
영적인 성장. 높아짐은 세속적인 성공이 아닌 겸손과 자기 비움을 통해 이룰 수 있다.
- 1이 신이라면 ∞(무한)은 악마다.
신은 단 하나의 진리. 악은 끊임없이 증식하고 분열하며 무질서한 것.
20. 불가능
20260327
- 인간의 삶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불행만이 그 사실을 느끼게 한다.
- 불가능한선. "선은 악을 부르고 악은 선을 부른다. 이것은 언제 끝날까?"
- 선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간은 늘 선의 불가능성을 보지 않기 위해 멋대로 상상력을 발휘한다(우리를 부숴버리는 사건이 아니라면, 악의 한 부분을 은폐하고 가공의 선을 덧붙이기만 하면 된다. 심지어 부서졌는데도 그럴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인간의 삶은 우리가 원하는대로만 되지 않는다. 불행으로 인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선과 악은 완전히 분리되어있지 않다.
완전히 순수한 선은 인간에게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간은 선이 완전히 가능하다고 여기기 위해 현실을 왜곡한다.
- 욕망은 불가능하다. 대상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은 하나가 될 수 없고 나르시스는 둘이 될 수 없다.
원하는 것을 완전히 만족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욕망은 상대를 소비하거나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타인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고, 자기 자신도 분리할 수 없다.
- 우리의 삶은 불가능이고 부조리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은 그것에 결부된 조건이나 결과와 모순되고, 우리가 제기하는 명제는 모두 반대 명제를 내포하며, 모든 감정은 반대되는 감정과 섞여 있다. 우리는 모순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신이고, 신과 무한히 다르다.
우리의 삶은 원하는대로 되지 않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인간은 피조물인 동시에 신이고, 또 동시에 신과 무한히 다르다. 인간은 모순이다.
- 불가능은 초자연을 향해 열린 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 문을 두드리는 것뿐이다. 열어주는 이는 따로 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험은 불가능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그저 그 문을 두들리 수 있고, 열어주는 것은 인간이 아니다.
- 꿈에서 벗어나려면 불가능과 접촉해야 한다. 꿈속에는 불가능이 없다. 단지 무능이 있을 뿐이다.
꿈 속에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가능이다.
그래서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계와 불가능을 받아들여야 현재를 살 수 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에는 일종의 유머가 들어 있다.
- 우리 몸은 지렁이와 마찬가지로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오려면 땅으로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강생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그려보는 방식 중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다.
- 강생은 불가능한 하강을 생각하는 가장 구체적인 방식이다.
>> 강생(降生): 높은 존재나 귀한 존재가 이 세상에 태어남을 이르는 말
하늘에 있는.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우리에게 오려면 낮은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신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들다.
가장 높은 것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은 불가능한 하강이다.
- 우리는 알고 원하고 사랑하는 존재다. 우리가 알고 원하고 사랑하는 대상에 주의를 기울여보면, 그중에 불가능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오직 거짓만이 분명한 사실을 은폐할 수 있다. 그 불가능성을 의식하게 되면 우리는 사랑하고 알고 원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기를 욕망하게 된다.
인간은 알고 원하고 사랑할 수 있지만 그 중에 가능한 것은 없다. 그 사실을 거짓으로 은폐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우리는 갖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
- 선행. 어떤 행동을 그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것임을 온 영혼으로 의식하면서 완수할 때가 좋은 행동이다.
- 선을 행하기. 어떤 행동을 하든 나는 그것이 선이 아님을 명확하게 안다.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진정한 선행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는 것이다.
선한 존재만이 선한 행동을 할 수 있다. 인간은 선하지 않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 없다. 오직 신만이 진정한 선을 행할 수 있다.
21. 모순
20260327
- 정신이 맞닥트리는 모순들, 유일한 실재, 실재를 판단하는 기준. 상상적인 것 속에는 모순이 없다. 모순은 필연을 가늠하는 시험이다.
-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느껴지는 모순, 그것은 찢김이다. 십자가.
현실은 단순하지 않고 모순을 동반한다. 상상 속에는 모순이 없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신의 사랑과 인간의 비참함을 동시에 느낄 때, 그것은 고통이 된다.
- 어떤 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 안의 모순이 드러난다. 그리고 일종의 박리剝離가 일어난다. 그것을 견뎌내면 집착에서 벗어나게 된다.
무엇인가에 주의를 기울이면 그것의 한계와 모순을 볼 수 있다.
그 불완전함을 회피하지 않고 견뎌야 소유하고싶은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순수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 모든 참된 선은 모순되는 조건들을 포함하며, 따라서 불가능하다.
- 마찬가지로 모든 진리는 모든 모순을 포함한다.
- 모순은 피라미드의 정점이다.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선을 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군가를 도와주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겐 피해를 끼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진리.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모든 가치를 포함한다.
모순을 받아들여야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할 수 있다.
- 어린 시절에 시작되어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가장 큰 고통은 바라보는 것과 먹는 것이 서로 다른 작용이라는 점이다. 영원한 지복至福은 보는 것이 곧 먹는 것이 되는 상태이다.
>> 지복 : 더할 나위 없이 크고 완전한 행복
우리는 어떤 대상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대상을 소유하는 것과 그저 바라보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 두 가지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인간의 근원적 결핍이며 그 둘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 완전한 행복의 상태이다.
- 모든 선은 악과 연결되어 있다. 선을 원하지만 그에 부응하는 악을 주위에 퍼뜨리고 싶지 않을 때, 어차피 악을 피할 수는 없으니, 그 악을 우리 자신에게 집중시킬 수밖에 없다.
- 따라서 완전히 순수한 선을 원하려면 최후 단계의 불행을 자기 몫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선을 행했을 때 발생하는 부수적인 악이나 고통을 타인에게 전가하지 않고 싶다면, 온전히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
완전히 순수한 선에 도달하려면 세상의 고통을 남에게 떠넘기지 않고 자발적으로 고통을 선택해야 한다.
- 십자가의 신비는 모순 안에 있다. 그리스도는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동의했고, 그와 동시에 어쩔 수 없이 벌을 받았다.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는 것만 생각한다면 우리도 기꺼이 원할 수 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받는 벌은 원할 수 없다.
진정한 희생은 모순 안에 있다. 내가 제물이라는 거룩한 자부심조차 없는 상태일 때 진정한 희생을 할 수 있다.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비참함과(벌을 받는 것) 스스로를 희생하는 의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 모순.
22. 필연과 선의 거리
202600327
- 필연은 신의 장막이다.
- 필연. 신의 냉담과 공평함을 인간의 지성이 파악할 수 있도록 드러내주는 형상.
세상의 법칙. 필연은 신을 직접 보여주지 않는다. 신은 모습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필연. 자연의 법칙 뒤에 있다.
이 세상은 누구에게나 감정 없이, 냉정하고 공평하게 작동한다.
-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단일성을 향해 올라가거나 무한성을 향해 내려가야 한다.
- 한계는 신이 우리를 사랑한다는 증거다.
한계를 벗어나려면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향해 영혼을 고양시키거나, 스스로를 비움으로써 무의 상태로 내려가야 한다.
인간이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전능하지 않고 고통이 있다는 뜻이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아닌 신을 필요로하게 된다.
- 무한은 일자一者가 겪는 시험이다. 시간은 영원을 시험하고, 가능성은 필연을 시험하고, 변이는 불변을 시험한다.
무한. 끊임없이 바뀌고 변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진리가 겪는 시험. 고통스러운 시간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을 때 우리는 영원해지고,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우리가 필연을 받아들일 때, 변하지 않는 가치를 생각할 때 우리 영혼은 한층 더 높아진다.
23. 우연
20260328
- 내가 사랑하는 존재들은 피조물이다. 그들은 우연에서 태어났다. 내가 그들과 만난 것 역시 우연이다. 그들은 죽음을 맞을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행하는 것은 제한되어 있고, 선과 악이 섞여 있다.
- 온 영혼으로 그것을 알면서도 전과 똑같이 사랑할 것.
- 신이 유한한 것들을 유한한 것으로서 무한히 사랑함을 본받을 것.
인간이 사랑하는 대상은 만들어진 존재이다. 우연에서 태어난. 내가 그들과 만난 것은 필연이 아닌 우연이다. 피조물은 언젠가 죽는다. 영원하지 않으며 절대 선도 아니다.
이같은 사실을 회피하지 말고 받아들일 것. 받아들임과 동시에 사랑할 것. 불완전한 존재임을 알고도 받아들일 것.
신이 피조물을 그 자체로 사랑하듯 우리도 그 자체로 사랑할 것.
- 우리는 가치 있는 모든 것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그런데 가치 있는 모든 것은 만남으로 생겨났고 만남으로 지속하고 만남이 끝날 때 멈춘다. 불교의 중심 사상(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 이 사상은 우리를 곧바로 신에게 데려간다.
>>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 : 세상만물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끊임없이 변한다.
인간은 우리가 가치를 둔 것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가치'라는 것은 우리가 만남으로써 생기고, 헤어질 때 사라진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은 우리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신에게 도달하게 한다.
24.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는 부재한다
202600328
- 신은 부재의 형태로만 창조 속에 존재한다.
- 악, 그리고 신의 순결. 악이 없는 순결한 신을 생각하려면 신을 무한히 먼 곳에 놓아야 한다. 역으로 말하자면, 악이 우리에게 신을 무한히 먼 곳에 놓으라고 가르쳐준다.
신은 우리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완전히 깨끗한, 악이 없는 상태로 존재하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먼 곳에 있어야 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비참함, 고통은 우리가 신을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먼 존재로 생각하게 한다.
- 신이 나를 위해 일부러 고통을 보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로 여기게 된다.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가르쳐주어야 하는 고통의 중요한 쓰임새를 저버린 셈이다. 따라서 절대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통해 신을 사랑해야 한다.
- 내가 아무것도 아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겪는 고통을 신이 우리에게 준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만함이다. 우리는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게 아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이다. 고통의 진짜 목적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하는 것이다. 나의 자아를 온전히 비워내고 그 아무 것도 아님을 사랑해야 한다.
-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그 고통에 대한 위로이다. 고통은 이유가 설명되지 않아야 한다.
- 그것이 바로 죄 없는 자들에게 주어진 고통의 최고 가치다.
고통에 이유를 붙이는 것은 자기 위안이다. 그렇게 고통을 덜어내서는 안 된다. 고통은 이유가 없는 그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 따라서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이야 말고 이유가 없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그런 비참함, 공허, 고통만이 우리의 영혼을 높여준다.
25. 무신론의 정화
20260328
-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모두가 진실인 경우. 신은 존재한다,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문제일까? 나의 사랑이 환상이 아님을 전적으로 확신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신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실재적인 그 어떤 것도 내가 신이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면서 떠올릴 수 있는 것과 닮지 앟았음을 전적으로 확신한다는 의미에서, 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내가 떠올릴 수 없다고 환상은 아니다.
신의 존재와 존재하지 않음은 둘 다 맞는 말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실재한다는 믿음에서 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실재하는 어떤 것을 내가 신이라고 여길 때 그것은 신이 아니다. 따라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정의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 똑같이 신을 체험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신을 부정하는 사람이 신과 더 가까이 있다.
-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서 진짜 신을 닮은 가짜 신은 우리가 진짜 신에 영원히 이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다.
- 신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있는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서 진짜 신을 닮은 신을 믿는다.
신을 직접 느끼지 못하면서 신을 믿는 척하는 것보다 차라리 신을 믿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거짓 신(우상)은 우리가 진짜 신에게 갈 수 없도록 막는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인간이 믿는 신은 대부분 가짜 신. 우상이므로 그 가짜를 믿지 않도록 하는 무신론적 태도가 필요하다.
- 위안의 원천으로서의 종교는 진정한 신앙을 가로막는다. 그런 의미에서 무신론이 정화 작용을 할 수 있다. 내 안에서 신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은 부분으로서는, 나는 무신론자여야 한다. 자기 안에서 초자연적인 부분이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신자가 아니라 무신론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에 위안을 얻는 용도로서의 종교는 진정한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진정하 신앙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 거짓된 신앙을 버리는 것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내 안에서 세속적인 것들을 거부해야 한다.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은 상태에서 거짓된 신을 믿는 것보다 차라리 정직한 무신론자로 사는 것이 낫다.
26. 주의력과 의지
20260331
- 신앙의 단계들. 가장 범속한 진리라도 온 영혼을 사로잡으면 계시가 된다.
>> 범속하다 : 평범하고 속되다.
평범하고 속된 진리라도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면 깨달음이 된다.
- 의지가 아니라 주의력으로 과오들을 치유하려 해볼 것.
- 의지는 가까이 있는 물건들을 옮겨놓기 같은 근육 운동에 힘을 미칠 뿐이다. 나는 손을 펴서 탁자 위에 얹고 싶을 수 있다.
- 우리는 그것들을 원하며 간청할 뿐이다. 그렇게 간청한다는 것은 곧 하늘에 아버지가 존재함을 믿는 것이다.
- 덕을 행하기 위하여, 시를 쓰기 위하여, 혹은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하여 근육을 긴장시키고 이를 악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주의력은 전혀 다른 게 아닐까?
- 그렇게 긴장한 상태가 바로 오만이다. 오만한 자에게는(이중의 의미에서) 은총이 없다. 그것은 오류의 결과다.
행하려는 마음. 의지가 아닌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으로 우리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볼 것.
의지는 단순히 몸을 움직이려는 수준에 불과하다.
내가 무엇을 해내겠다는 의지가 아닌 '제게 보여주소서'와 같은 간청하는 태도. 내가 가진 힘의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이다.
억지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 집중하는 것은 오만이다. 주의력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자아가 긴장해있는 상태에서는 은총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
- 가장 높은 단계에서의 주의력은 기도와 같다. 믿음과 사랑을 상정한다.
- 그 어떤 것과도 섞이지 않은 주의력은 기도이다.
마음을 비우고 한 대상을 집중해서 바라보는 것은 기도와 같다. 믿음과 사랑을 전제로 한다.
- 잘못된 방식으로 찾기. 한 가지 문제에 묶인 주의력. 그 역시 빈자리를 두려워하는 현상이다. 우리는 자기 노력이 헛수고이기를 바라지 않는다. 악착같이 쫓기. 찾아내기를 원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나치게 헌신할 때처럼 노력의 대상에 종속된다. 우리는 외적인 보상이 필요하고, 때로 우연이 그런 보상을 제공하면 진실을 왜곡하면서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한 가지 문제를 가지고 답을 얻기 위해 집착하는 것은 빈자리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억지로 답을 찾아내려고 한다. 내가 원하는 답을 만들어낸다.
- 글을 쓰는 것은 아이를 낳는 것과 같다. 안 그러려 해도 저절로 지고의 노력을 쏟게 된다. 행동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지고의 노력을 쏟지 못할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자신을 속이지 않고 주의력을 기울인다는 조건하에서 그렇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할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제대로 집중하면 된다.
- 학문과 신앙, 기도는 순수한 형태의 주의력이고 학문은 주의력의 훈련이다.
- 비유, 상징 등을 이해하는 방법. 그것들을 해석하려 하지 말고 빛이 솟아날 때까지 주시할 것.
- 일반적으로, 지성을 훈련시키는 방법은 주시하기이다.
- 실제와 환상을 구분할 때 이 방법을 적용할 것. 감각을 통한 지각에서 눈에 보이는 것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위치를 바꿔가며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면 실재가 나타난다.
학문과 신앙, 기도는 순수하게 한 대상을 바라보며 집중하는 것이다.
비유와 상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애써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서 들여다보면 된다.
지성을 훈련시키는 방법은 충분히 오래 바라보는 것이다.
실제인지 환상인지 구분이 어려울 때에는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 충분히 오래,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면 된다.
- 우리가 신에 대하여 아는 것은 신이 우리와 같지 않다는 것뿐이다. 우리의 비참함이 신을 보여주는 형상일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의 비참함을 응시하는 만큼 신을 응시하게 된다.
우리는 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다. 다만 우리와 다름을 알고, 우리의 한계를 맞닥뜨려 비참해질 때. 그때 신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우리의 비참함을 오래 바라볼 때 그만큼 신을 볼 수 있게 된다.
27. 길들이기
20260331
- 불가능에 이르기 위해서는 가능을 실행해야 한다.
- 몸을 움직여야 감각적 대상들을 지각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몸이 마비되면 지각이 불가능하다.
불가능해보이는 것에 도전하려면, 가능한 것부터 행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실천을 해야 한다. 실제 행동이 없으면 알 수 없다.
- 길들이기. 문득 자기 안에 본의 아니게 오만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과거에 겪었던 굴욕을 기억하고 주의력을 집중시켜 바라볼 것.
- 창유리가 붉은색이면 내 눈에 보이는 방은 일 년 내내 분홍색일 수밖에 없다.
- 영리한 개를 얻기 위해 길들이는 과정에서 매질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따라서 훈련을 게을리할 때만 떄려야 한다. 아무 때나 때리면 조련은 실패하고 만다. 그릇된 금욕주의가 낳는 결과이다.
길들이기. 우리 마음이 오만해질 때 과거에 겪었던 비참함을 떠올리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오래 바라볼 것.
내 마음의 상태에 따라 이 세상을 온전하게 보지 못할 수 있다.
때론 자기 통제도 필요하지만 아무 때나 지나치게 통제하면 자기 학대가 되고, 실패하게 된다.
- 희망은 우리가 내면에 품고 있는 악이 유한함을 알고, 영혼이 단 한 순간만이라도 선을 지향하게 되면 어느 정도 그 악을 없앨 수 있음을, 영적인 영역에서 모든 선은 반드시 선을 만들어냄을 아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의 악은 한계가 있다. 마음 속의 고통이 영원할 것 같아도 끝이 있다. 모든 것이 선하진 않더라도, 잠깐이라도 선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만으로도 악을 어느정도 없앨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함이 아닌 방향.
작은 선이라도 한 번 행하면, 헛수고로 끝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선을 만들어낸다.
28. 지성과 은총
20260403
- 지성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 파악해내는 것보다 더 실재적임을 우리는 지성을 통해 안다.
- 신앙은 지성이 사랑의 빛을 받는 체험이다.
- 단지 지성은 그 고유한 수단, 즉 확인과 증명을 통해서 사랑의 우월성을 알아보아야 한다. 지성의 복종은 이유를 아는 상태에서 완전히 확실하고 명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과오이다.
현실에서는 우리가 알아내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많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우월한 것.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제대로 알고 인정해야 한다.
- 지성의 영역에서 겸손의 덕은 바로 주의력이다.
- 그릇된 겸손은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서, 이런저런 개별적 인간으로서 스스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 참된 겸손에서는 지성이 큰 역할을 한다. 보편적인 것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다. 겸손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주의력이다. 자아를 버리고 보편적인 진리에 집중해야할 때 지성이 도움이 된다.
- 바흐의 곡이나 그레고리안 성가의 선율을 들을 때, 하나하나가 각자의 방식으로 완벽하게 아름다운 그 선율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영혼의 모든 능력이 긴장하고 숨을 죽인다. 특히 지성이 그렇다. 지성은 그 음악에서 긍정 혹은 부정할 것을 찾아내지 않는다. 그 음악을 자양분으로 삼는다.
- 신앙은 이런 식의 받아들임이어야 하지 않을까?
- 응시의 대상이 되어야 할 신앙의 신비를 긍정하거나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다루면 신앙의 신비가 타락한다.
아름다운 음악을 감상할 때 우리는 그 곡이 옳고 그른지 생각하지 않는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 집중한다.
신앙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야 한다. 신앙의 신비를 옳다 그르다 판단할 게 아니라 그저 집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 지성(긍정하거나 부정하고 의견들을 제시하는 우리 안의 한 부분)의 몫은 오로지 복종이다. 내가 진실하다고 이해하는 것은 오히려 진실성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사랑하고 있는 것들만큼 진실되지 못하다.
내가 안다고 여기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사랑하는 것과 같다. 진리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알고 낮은 자세로 복종해야 한다.
-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욕망은 이미 발견된 것에 담긴 표현할 수 없는 초월적 의미를 숙고하지 못하게 한다. 나에게는 그런 욕망을 가질 만한 재능이 없는 것이 오히려 커다란 은혜이다. 지적인 재능이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아무런 집착 없이 지성을 발휘할 수 있다.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한 의미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욕심이나 허세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얽매이지 않고 지성을 발휘할 수 있다.
29. 읽기
20260403
- 올바름. 남이 우리와 같이 있을 때 (혹은 우리가 남을 생각할 때) 우리가 그 사람에게서 읽어내는 것이 실제의 그와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 인간은 저마다 자기를 다르게 읽어달라고 침묵 속에서 외친다.
- 나는 남을 읽지만, 남도 나를 읽는다.
인간은 타인을 바라볼 때 각자의 생각으로 판단하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내가 남을 나의 기준에서 판단하듯, 남도 나를 그의 기준에서 판단한다.
- 인간은 정의를 어기겠다는 의지로 불의를 저지르기도 하고, 정의를 잘못 읽은 탓에 불의를 저지르기도 한다. 두 번째 경우가 대부분이다.
- 모든 사람이 언제나 각자가 읽어낸 정의에 따라서 행동한다면, 올바른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어떻게 다를까?
- 읽기들. 읽기는 중력에 따른다(어느 정도 수준에 오른 주의력은 예외다). 우리는 중력이 제안하는 의견을 읽는다(인간들과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판단에는 정념과 사회적 순응이 상당히 큰 몫을 한다).
인간은 보통 악한 의도로 나쁜 일을 행하는 것보다, 정의를 잘못 판단했을 때 나쁜 일을 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판단은 중력을 따른다.
중력에 이끌려 상황을 왜곡하지 말고 중력에서 벗어나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 중첩된 읽기. 감각 너머로 필연을 읽을 것. 필연 너머로 질서를, 질서 너머로 신을 읽을 것.
- 심판하지 말 것. 그것은 무관심이나 회피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신의 심판을 모방하는 초월적 심판이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믿을 게 아니라, 우리의 감각 너머 필연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너머의 질서를 보고, 그 너머의 신을 보아야 한다.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 것. 무관심이나 회피가 아닌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는 심판. 즉 완벽한 판단을 내리려고 하지 말 것.
30. 기게스의 반지
20260405
- 반지를 끼고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된 기게스, 그것은 따로 떼어내서 생각하는 행위다. 자기가 저지르는 범죄와 자기 자신을 뗴어놓고 생각하기. 그 둘을 연결 짓지 않기.
- 열쇠를 버리고 기게스의 반지를 버리는 행위는 바로 의지의 노력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로 고통스럽게 동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기게스의 반지. 반지의 제왕 스토리처럼, 착용자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반지. 범죄와 나 자신을 떼어서 따로 생각하는 것. 연결짓지 않는 것.
이러한 행동은 타락이다. 진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의지와 고통이 필요하다.
편하게 살려면 나와 범죄를 따로 떼어놓고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 하지만 괴롭더라도 나의 잘못을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것이 진실된 것이다.
- 우리가 생각으로 관계짓지 않으면 그 어떤 관계도 생기지 않는다. 2와 2는 우리의 생각이 그 둘을 더해 4로 만들지 않으면 영원히 2와 2일 뿐이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냥 두면 아무 것도 연결되지 않는다. 우리가 대상을 연결하고, 의미를 부여한다. 이 세계는 있는 그대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으로 관계를 지으면서 만들어진다.
31. 우주의 의미
20260405
- 우주와 하나가 될 것. 우주보다 작은 것은 모두 고통에 매여 있다.
- 내가 죽어도 우주는 여전히 지속된다. 내가 우주와 하나가 아니라면 이것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주가 내 영혼의 또다른 몸이라면, 나에게는 나의 죽음이 타인의 죽음보다 더 중요할 게 없다. 내 고통도 마찬가지다.
나 자신. 개인 중심에서 벗어나 우주 전체를 나 자신과 동일시할 것. 그러면 나의 고통이나 죽음은 나의 일부일 뿐이다. 자아를 확장시키면 모든 고통은 그저 일부일 뿐이다. 내 고통만 특별한 것이 아니게 된다.
- 우리는 집착에서 벗어나지 않고, 다른 집착으로 바꿀 뿐이다. 모든 것에 집착하기.
- 모든 감각을 통해 우주를 느낄 것. 그것이 쾌락이든 고통이든 상관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서 손을 잡을 때, 너무 꽉 쥔 탓에 손이 아프다 한들 무슨 상관인가.
- 고통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세계를 잃게 된다. 하지만 그 뒤에는 평온해진다. 다시 격심한 고통이 와도, 곧 다시 평온해진다.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세계를 잃는 격심한 고통의 단계는 다가올 평안을 위한 기다림이 되고, 따라서 세계와의 접촉도 끊기지 않는다.
인간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저 집착의 대상을 바꿀 뿐이다.
고통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이 세계의 의미가 사라진다. 생각이 멈추고 평온해진다. 고통은 끝이 아니라 평온함으로 전환되는 연결고리.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으면 고통 속에서도 세계와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는다.
- 세 살 난 아이의 부모가 자기 아이가 삼 년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생각하지 못하듯이,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에는 모르고 지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 나는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는 것 같다. 사랑할 줄 알았다면 지금 같지 않을 것이다. 내 사랑이 몇몇 사람에게만 매여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라면 어디에나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다.
- 태양이 만물을 비추듯이 그렇게 사랑하라.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원래부터, 처음부터 사랑했던 것처럼 느낀다.
내 사랑은 몇몇 특정 대상에게만 묶여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대상이라면 어떤 것이든 사랑하는 것이다.
태양처럼 대상을 가리지 않고 빛을 비춰야한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랑해야 한다.
32. 중간적인 것
20260405
- 이 세계는 닫혀있는 문이다. 장애물이다. 그와 동시에, 통로다.
- 지하 독방에 나란히 갇혀서 벽을 두드리며 교신하는 두 죄수. 이때 벽은 두 사람을 갈라놓지만 동시에 교신하게 해준다. 우리와 신 사이도 마찬가지다. 모든 분리는 연결이다.
닫혀있는 문. 벽. 우리는 이런 것들을 장애물이자 방해물로 여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문을 두드릴 수 있고 교신할 수 있다. 벽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드릴 수 있고, 관계가 생성된다. 모든 장애물은 관계와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33. 아름다움
20260405
- 아름다움은 거리에서 오는, 체념을 내포하는 관능적 매력이다. 아주 은밀한 체념, 상상력을 버리는 체념까지 포함한다. 먹어버리고 싶어지는 욕망의 대상들과 달리 아름다움은 그런 마음 없이 욕망한다. 우리는 그것이 그대로 있기를 바란다.
보통 인간의 욕망은 먹고 싶거나 갖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그대로 두고 싶은 것이다. 소유하려고 하거나 파괴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게 둔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집착하는 것에서 그대로 바라보는 것으로 바꾸는 힘이다.
34. 대수학
20260405
- 우리의 문명을 상세하게 조사하기 혹은 비판하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함정이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창조한 것의 노예가 되게 했는지 밝혀볼 것.
인간의 문명. 인간은 왜 우리가 만들어낸 것에 지배당하는 것일까? 돈, 명예,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것들에 속박되는 것일까?
- 자본주의는 인간 집단을 자연으로부터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렇게 해방된 인간 집단은 자연이 행하던 억압적 기능을 이어받아 개인에게 행했다.
- 물질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불, 물 등등. 인간 집단은 자연의 힘을 모두 차지해버렸다.
- 질문. 사회가 얻어낸 자연으로부터의 해방을 개인에게 전이시킬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추위나 굶주림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켰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다시 집단이 개인을 지배하게 한다.
진짜 자유를 개인에게 주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 우리의 문명은 인간을 온전히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인가?
35. 사회적 낙인
20260406
- 행동과 그 결과, 노력과 그 성과 사이에 외적인 의지가 개입되는 한, 인간은 노예이다.
- 오늘날의 노예 그리고 주인 모두 그렇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동의 조건들을 절대 직접 마주하지 않는다. 사회라는 장막이 자연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데, 사회가 그것을 막는다. 인간은 자연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들. 즉 타인의 기대나 인간이 정한 규칙 , 권력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닌 노예가 되는 것이다.
- 외적인 의지에 종속되면 노예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인간의 운명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종속되고, 주인은 노예에게 종속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비굴해지거나 전제적이 되게 하는, 혹은 동시에두 가지 다 되게 하는 상황("힘을 얻기 위해 무엇에든 복종한다"). 반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연과 마주했을 때는 인간에게는 사고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인간은 노예가 될 운명이다. 노예는 주인이 있기에 존재하고, 주인은 노예가 있기에 존재한다. 둘 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에서 서로에게 종속된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마주하면 인간은 생각하게 될 뿐이다.
- 일시적인 기분에의 복종이 어째서 노예 상태인가? 그 최종 원인은 영혼과 시간의 관계 속에 있다. 자의적인 것에 복종하는 사람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고, 그는 다음 순간이 가져다줄 것을 기다리게 된다(너무도 굴욕적인 상황이다). 자기의 시간을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없다. 현재를 지렛대 삼아 미래로 가는 게 불가능해진다.
기분에 따라 사는 사람은 노예이다. 자기 삶을 스스로 끌고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저 다음 순간을 기다리는 상태. 수동적이고 굴욕적인 상황.
- 사물들과 마주하면 정신이 자유롭게 풀려난다. 사람들과 마주하면 정신이 타락한다. 복종의 형태이든 지배의 형태이든 아무튼 사람들에게 의존하면 그렇다.
- 해결책. 우애를 나누는 사이만 제외하고 사람들을 그저 풍경으로 대할 것. 절대로 우정을 구하지 말 것.
- 무엇보다도 우정을 꿈꾸려 하지 말 것. 어디나 대가가 따른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기대할 것.
인간 관계에 집착할수록 정신은 타락한다.
사람을 풍경으로 대해야 한다. 인간 관계에 의존하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그저 자연으로 대해야 한다.
- 억압이 어느 정도의 단계를 넘어서면 노예들은 필연적으로 강자를 숭배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노리개가 되어 전적으로 강제에 묶여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제를 벗어날 수단을 잃어버린 사람은 해야만 하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원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복종이 아니라 헌신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럴 때는 해야 하는 것 이상을 해내려고 노력하게 된다. 그러면 고통이 줄어든다.
- 예속의 굴종은 그런 우회를 거쳐 인간의 영혼을 타락시킨다.
- 강제당한다는 참기 힘든 생각을 헌신한다는 환상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관념으로 대체하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다.
>> 예속 : 남에게 묶여 있음.
>> 굴종 : 고개 숙이고 따름.
인간은 괴로운 상황에서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것을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래서 강제된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긴다.
억지로 시켜서 하는 복종은 견디지 못하지만 스스로 하는 복종은 견뎌낸다.
이런 자기합리화는 인간을 낮은 곳으로 향하게 한다. 어쩔 수 없는 필연이라고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다.
- 강요된 복종 속에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주인을 사물로 여기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필연의 노예이지만 그것을 자각하는 노예는 훨씬 높이 있다.
진정한 자유는 내가 노예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한다.
36. 거대한 짐승
20260406
- 거대한 짐승은 우상 숭배의 유일한 대상이고, 신의 유일한 대용품이며, 나로부터 무한히 떨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나 자신인 대상에 대한 유일한 모방이다.
거대한 짐승. 거짓 신. 대용품. 사람들이 진짜 신을 찾지 못해 대신 숭배하는 것은 거대한 짐승이다.
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 자신인 대상. 신에 대한 유일한 모방이다.
- 인간이 이기주의자일 수 있다면 상당히 편할 것이다. 그러면 휴식을 누릴 수 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인간은 이기주의자일 수 없다.
- 나 스스로를 목적으로 간주할 수 없다.
- 목적으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집단뿐이다.
인간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할 수 있다면 오히려 편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없다. 인간은 개인이 아닌 집단을 숭배한다.
- 같은 이름으로 불리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두 가지 선이 있다. 하나는 악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의 선이고, 또 하나는 절대로서의 선이다. 절대는 반대를 갖지 않는다. 상대는 절대의 반대가 아니라 절대로부터 파생한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대로서의 선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악의 상관항으로서의 선뿐이다.
- 하녀를 주인 아가씨인 줄 알고 사랑에 빠지는 귀공자처럼, 그런 선이 절대적인 선인 줄 알고 다가가는 것이다. 옷 때문이다. 사회적인 것이 상대에 절대의 옷을 입힌다.
- 관계는 사회적인 것을 부수면서 그로부터 벗어난다. 관계는 개인의 전유물이다. 사회는 동굴이고, 동굴을 나서면 고독이다.
인간은 절대적인 선을 원하지만 상대적인 선만 맞닥뜨릴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상대적인 선에 절대적인 선의 옷을 입혀 인간으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든다.
개인과 개인의 관계는 사회의 역할이나 규칙을 부수면서 벗어날 수 있다. 사회에서 벗어나면 더 이상 집단에 기대지 못하고 진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고독.
- 식물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은 선이 들어가지 못하는 두 영역이다.
- 그리스도는 식물적인 것의 죄를 대속했고, 사회적인 것의 죄는 대속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 사회적인 것은 세상의 왕의 영역이다. 사회적인 것에 대하여 우리가 갖는 의무는 악을 제한하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뿐이다(리슐리외에 따르면 국가의 구원은 오직 이 세상 안에 있다).
식물적인 것. 자연. 사회적인 것. 인간 사회.
그리스도는 자연의 죄는 대속했지만 사회적인 것의 죄는 대속하지 않았다. 사회, 권력과 같은 것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다.
사회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악을 제한하는 것 뿐이다.
- 교회처럼 신성을 주장하는 사회는 그것을 더럽히는 악보다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선의 대용품 때문에 더 위험하다.
- 사회적인 것에 붙여진 신성의 이름표. 그 황홀한 혼합 속에 모든 방종이 들어 있다. 변장한 악마.
실제로 악보다 선처럼 보이는 거짓된 대용품이 더 위험하다.
- 사회적인 것에 대한 응시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나기만큼 좋은 방법이다.
사회를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자유, 해방의 시작이다.
동굴에서 나오면 고독하지만. 어렵지만. 이 세상을 똑바로 바라봐야 한다.
- 사회적인 것이 갖는 힘. 몇 사람의 합의가 실제감을 준다. 또한 의무감을 준다. 그 합의에 어긋나면 죄가 된다.
- 거짓 신을 섬기면(어떤 모습으로 육화되었든 사회라는 거대한 짐승을 섬기면), 악에 대한 공포를 제거함으로써 악을 정화하게 된다. 거짓 신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섬김을 게을리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도 악이 아니다. 그러나 참된 신을 섬기면 악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기는 커녕 오히려 강해진다. 악에 대해 공포를 느끼면서, 동시에 악을 신의 뜻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랑하기.
집단의 합의는 진실이 아니다. 거짓 신을 섬기면 악에 대한 공포를 제거하면서 합리화하면 악을 정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참된 신을 섬기면 악의 존재 조차도 신의 뜻에서 비롯된 것일 뿐임을 알 수 있다.
- 어떤 선을 사랑했는데 이어진 사건들로 인해 그 선이 더는 선이 아니게 될 때, 그런 선을 바라보는 것은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이 선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고통스럽고, 그래서 우리는 그 생각을 멀리하게 된다. 그렇게 거대한 짐승에 복종한다.
절대 선은 깨지지 않는다. 반대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절대 선이라고 생각했던 상대적인 선이 깨질 때 인간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고통을 피하기 위해 다시 사회에 복종하게 된다. 사회를 따르게 된다.
37. 이스라엘
20260407
- 이스라엘이 로마에 맞설 수 있었던 것은 로마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발생 초기부터, 다시 말하면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기 이전에 이미 로마로 인해 더럽혀졌다. 로마가 행한 악이 진정으로 회복된 적은 없었다.
로마와 비슷한 방식을 취했기 때문에 로마에 맞설 수 있는 것.
이스라엘. 예수의 탄생지. 작가는 로마를 세속적인 곳으로 여겼나보다.
로마의 영향으로 이스라엘도 변질되었다.
38. 사회의 조화
20260407
- 균형이란 한 질서가 다른 질서에 복종한 상태이다. 그때 다른 질서는 본래의 질서를 초월하면서 또한 본래의 질서 안에 무한히 작은 형태로 들어 있다.
- 사회 속의 각 개인은 무한히 작지만 사회적인 것을 초월하는 무한히 큰 질서를 나타낸다.
균형은 평등한 질서가 아닌 하위 질서가 상위 질서에 복종할 때 생긴다. 진리와 인간. 사회와 질서.
상위 질서는 하위 질서를 넘어서는 동시에 하위 질서, 즉 인간의 안에 작게 들어 있다.
개인은 작은 존재지만 사회적인 것보다 더 높은 질서를 담고 있다.
- 불가능한 미래는 가능하다는 환상만 없으면 에너지 손실을 불러오지 않을 수 있다. 불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영원으로 옮겨 가기 때문이다.
- 가능성은 상상력의 자리이며, 따라서 에너지 손실이 일어난다. 확실히 존재하는 것 혹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원해야 하고, 두 가지를 모두 원하면 더 좋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다고 믿는 것은 에너지의 낭비이다. 현실 인식 없는 희망은 영혼을 소모시킨다.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는 순간 그것은 현실의 욕망에서 사라지고 영원으로 옮겨 간다. 초월한다. 마치 영원한 사랑이 현실에서 불가능하지만 초월의 영역에서는 가능하듯이.
가능성도 그저 상상일 뿐이며 에너지가 낭비된다. 확실히 존재하는 현실을 원하거나 절대 불가능한 절대적인 선을 원해야 한다. 그 중간의 애매한 가능성을 버려야 한다.
- 상반되는 것들. 오늘날 우리는 전체주의를 갈망하면서 동시에 혐오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가지 전체주의를 사랑하면서 또 다른 전체주의를 증오한다.
- 우리는 늘 어떤 것을 증오하면서 그것을 다른 형태로 사랑하고 싶어 하는 걸까?
>> 전체주의 : 국가가 사회와 개인의 삶 전체를 완전히 통제하는 체제
인간은 전체주의를 싫어하면서도 질서, 안정적임을 원한다. 인간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선호하는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해서 사랑하고 증오한다.
인간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두려워하는 걸까. 책임지고싶지 않은 걸까.
39. 노동의 신비주의
20260407
-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힘들 사이에는 균형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인간 조건의 비밀이다.
- 균형은 오로지 노동 속에서 스스로의 삶을 재창조하는 인간의 행동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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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위대함은 언제나 자신의 삶을 재창조한다는 데 있다. 주어진 것을 재창조하기. 스스로 감내해야 하는 것까지도 다시 만들어내기.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고유한 자연적 존재를 만들어낸다. 학문을 통하여 상징을 수단으로 우주를 재창조한다. 예술을 통하여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재창조한다(에우팔리노스의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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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에 대한 혐오감은 시간의 무게이다. 그 혐오감을 인정하되 굴복하지는 않아야 상승할 수 있다.
- 모든 형태의 혐오감은 인간에게 상승을 위한 사다리로 주어진 가장 소중한 비참함 중 하나이다.
- 모든 혐오를 자기 혐오로 돌려놓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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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조로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거나 가장 추악하다. 영원성의 반영일 때는 가장 아름답고, 변화 없이 이어지는 영속성의 반영일 때는 추악하다. 초월된 시간 혹은 불모가 된 시간.
- 원은 아름다운 단조로움의 상징이며, 시계추의 움직임은 추악한 단조로움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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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의 영성. 노동은 튕긴 공이 되돌아오듯이 궁극적 목적이 튕겨 돌아오는 현상을 지치도록 느끼게 한다. 먹기 위해 일하고, 일하기 위해 먹는다.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궁극의 목적으로 보거나 혹은 둘을 서로 떼어놓고 각각을 목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진리는 이 둘의 순환 속에 있다.
-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와 천체의 회전. 극단의 비참함과 극단의 위대함.
- 자기 자신을 쳇바퀴 도는 다람쥐로 여길 때 인간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는다면 구원에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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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들에게는 빵보다 시가 필요하다. 그들의 삶이 시가 되어야 한다. 영원성의 빛이 필요하다.
- 오직 종교만이 시의 근원이 될 수 있다.
- 민중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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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성의 빛은 사는 이유, 일하는 이유를 주는 게 아니라, 그런 이유를 찾지 않아도 되는 충만함을 준다.
- 그렇지 못할 경우, 해야만 한다는 강제와 얻게 될 이득만이 자극제가 된다. 하나(강제)는 민중의 억압을 의미하며, 다른 하나(이득)는 민중의 타락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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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체노동. 몸속으로 들어오는 시간. 그리스도가 성체의 신비를 통해 물질이 되듯이, 인간은 노동을 통해 물질이 된다. 노동은 죽음과 같다.
- 죽음을 거쳐야 한다. 죽음을 겪어야 하며 이 세계의 중력을 견뎌야 한다.
- 자극제가 없는 노동은 죽음과도 같다. 행동이 가져올 결실을 포기하고 행동하기.
- 힘이 소진된 상태에서의 노동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종속된다. 사유가 과거나 미래에 매달리지 못하고 매순간 다음 순간으로 옮겨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복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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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중에 관한 시는 그 안에 피로가, 그 피로로 인한 배고픔과 목마름이 들어 있지 않다면 진정한 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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